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요? 쉽게 대답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다면 예수의 죽음은 예수만의 죽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고려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또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도 죽고 하나님도 같이 죽은 것일까요? 나중에 예수는 부활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예수와 함께 부활하셨을까요?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제목은 이렇게 정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고 주장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록 그 구호가 어떤 올바른 것을 암시해 주지만 '하나님의 죽음'은 기독교 신학의 기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 십자가의 죽음과 이러한 예수의 죽음 안에 계신 하나님만이 기독교 신학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90)
'하나님의 죽음'과 '하나님 안에서 죽음'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구분을 할 때 생기는 이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 죽음'을 말해야 삼위일체 관계 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의 죽음은 다른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이론인데, 셋은 하나로 완전하게 일치되지 않습니다. 물론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치되기도 하지만 완전한 하나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죽음'은 예수와 하나님의 밀접하고 강력한 연결 고리가 있고 그 관계성 안에서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죽음'은 삼위일체를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굳이 '삼'을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서 죽음'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 개념을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하면 훨씬 더 파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팔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예수, 다른 한쪽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이 두 팔을 잘라 버리면 단순한 하나님 개념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예수,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관계는 이야기를 만들죠.
십자가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존재의 한 복판에 서 있으며, 그 인격들을 서로서로에 대한 그들의 관계 내에서 분리시키는 동시에 결합시키고 또한 그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의 신학적 차원은 우리가 말했듯이 버림받으심과 헌신의 영 가운데 있는 예수와 그 아버지 사이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 내에서 아들로서 예수의 완전한 인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또한 신성과 인간성의 관계는 그분의 인격 가운데 물러가 버린다. 실제로 삼위일체를 말하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천상의 수수께끼 가운데서 사색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90)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삼위일체 안에서 이해할 때 예수의 죽음은 온전한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건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지 아들 안에 하나님의 신성을 채워 넣어서 인간의 머리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천상의 신비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본성은 인성 반, 신성 반이냐면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온전한 인성과 온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하는데요. 이것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인성이라면 전부 인간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온전한 신성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몰트만은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를 이해하면,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양성론도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적 존재를 인간적 존재에로 나아가는 그의 길 위에서, 또한 그와 반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삼위일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 내의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반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인격의 총체적인 면모로부터 출발하여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88)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제6장에서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합니다. 6장의 제목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입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278쪽부터 291쪽까지 내용의 제목은 "기독교 신학의 기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저는 제목을 다르게 붙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죽음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인가?" 몰트만의 대답은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은 예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정확히 말해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학적 사고에 있어서 새롭게 일치되는 방향은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물음과 하나님 인식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에로 집중시키며,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79)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예수의 죽음이라는 몰트만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 그리고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처럼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시킵니다. 둘 중에 하나만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을 A와 B, 이런 식으로 언급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B를 실현한 A, 또는 A한 자의 B,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규정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부활'과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의 그의 부활을 죽은 자들에게 보여주고 접근하게 하는 '부활하신 그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26)
이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하면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예수는 하나님 안에서 죽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몰트만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물론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면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 특별하게 거론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피해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관계 자체를 좀 더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안의 관계는 보통 관계는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무리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하나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 외에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꽤 많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만 삼위일체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또 오래된 주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는 존재론적으로 특별했는데, 그 안에는 신성이 있었다, 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데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십자가에서 죽은 이는 예수이지 하나님은 아니다'라는 몰트만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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