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노트

아우구스티누스_원죄론

설왕은31 2021. 2. 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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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는 무엇인가?

원죄는 원래 있는 죄, 본연의 죄, 근본적인 죄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를 의미합니다. 원죄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혹은 생명으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죄론에 따르면 어린아이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원죄론을 처음 만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니지만 그에 의해서 확립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죄론이 확립된 것은 5세기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원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유아 세례의 근거로서 원죄론을 사용합니다. 원죄론의 요점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본성이 마치 유전병처럼 후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린아이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원죄론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Image by falco from Pixabay  

원죄론을 만든 이유는?

초대 기독교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원죄의 개념을 만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원죄론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5, 개정)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5:12-21, 개정)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개정)

 

위의 성경 구절을 보면 한 사람 아담에 의해서 죄가 들어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시편 구절을 보면 인간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죄론을 만든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경험입니다. 분명히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저지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원죄를 근거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유전된 죄의 본성으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현대 신학에서 원죄론은?

원죄론은 현재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론입니다. 원죄론이 거부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 아니거나 죄를 지으려는 욕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론은 아담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본성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 현대 신학에서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원죄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원죄론을 거부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1] 첫째, 만약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유전된 죄의 본성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유전에 의해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를 물려받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다 키가 작아서 그 자녀가 키가 작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키가 작은 것은 그 사람의 본성 nature입니다. 그러나 그의 키가 작은 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농구 선수가 되고 싶은데 키가 크지 않아서 될 수 없다면 그 책임은 일부분 부모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의 본성 nature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기가 곤란합니다. 인간은 단지 그의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강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 본성이라면 죄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둘째, 원죄론이 인정되면 우리는 결혼과 출산, 더 나아가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죄론이 사실이라면 결혼과 출산은 인간이 자신의 후손에게 죄를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누군가에게 죄를 전달하고 퍼뜨리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 일을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성이나 부부 관계를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죄의 본성을 전달하는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인간의 육체나 인간이 자손을 낳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죄론이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고대 철학의 영향도 컸습니다.

 

원죄론의 수정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위에서 언급한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원죄론을 수정해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성서를 보면 분명히 아담과 우리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고 동시에 죄가 유전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수정본이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수정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인류의 대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장의 잘못은 전 직원의 잘못과 같다는 개념입니다. 어렸을 때 학급에서 누군가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였기 때문에 우리도 같이 죄를 지은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유럽에서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로 생겼습니다. 그전까지는 인간은 타인과 다른 한 개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의 한 존재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큰 연대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력한 연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곧 모두가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은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한 개인이라는 개념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둘째, 아담은 인류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을 상징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아담이 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은 곧 나인 것이죠. 아담의 죄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을 아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왜 모든 사람이 아담처럼 죄를 짓는지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원죄 교리의 본질적 의도

원죄 교리의 핵심 내용은 아담이 죄를 짓고 죄의 본성이 전인류에게 유전되었다는 것이지만, 원죄 교리의 본질적 의도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칠 때 제일 많이 사용하는 교재가 밀리오리의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이라는 책과 맥그래스가 쓴 <역사 속의 신학>이라는 책입니다. 밀리오리와 맥그래스가 원죄 교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에덴동산과 인간 타락을 전하는 성경 이야기의 목적은 죄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창조의 선함과 죄의 보편성을 상상력을 동원하며 묘사하는 데 있다그러므로 원죄 교리는 죄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성 전체가 죄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나 상태를 알려주는 주장이다.”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276)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하는 본질적인 요점은,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맥그래스, 역사 속의 신학, 558)

아우구스티누스

 

저는 맥그래스의 문장에 완전히라는 말을 더해서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교리의 의도는 한 개인이 그 사람의 죄악을 완전히 제어하거나 완전히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죠. 첫째, 인간은 인간의 죄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습니다.  원죄는 인간의 결함, 특별히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자유 의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지는 못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다이어트입니다. 다이어트의 방법은 정말 간단합니다. 적게 먹고 운동을 하면 살을 뺄 수 있습니다. 정말 쉽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합니다. 살을 빼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정하지만 실제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다이어트를 실패하는 것은 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가 되겠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유 의지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바로 원죄 때문이라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원초적인 결함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원죄 교리의 본질적 의도 중 하나입니다.

 

둘째, 원죄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완전히 자신 혼자만의 죄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한 개인만의 책임일까요? 극단적인 예로 자살을 생각해 봅시다. 기본적으로 자살은 기독교에서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살한 사람에게 그 죄의 책임을 온전히 지울 수 있을까요? 주변 친구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해서 자살을 한 고등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자살이라는 죄의 책임을 그 학생에게 다 돌릴 수 있을까요? 아니죠.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자살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 사람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살이라는 죄의 책임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문제이고 책임입니다. 이와 같이 원죄 교리는 죄에 대한 책임을 죄를 지은 한 개인에게만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죄론과 펠라기우스 논쟁

원죄론을 펠라기우스 논쟁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좋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지만 그 능력은 많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절대적 자유 의지를 긍정하면 그 이면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누구를 탓하거나 공동 책임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이론은 얼핏 보기에는 좋아 보이나 실상은 무서운 이론입니다. 용서, 화해, 은혜와 거리가 먼 이론입니다.

 

원죄론과 연대성의 회복

우리가 원죄 교리를 통해 일깨워야 할 것은 인류 공동체의 연대성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 교리를 통해 죄가 유전된다고 주장했지만, 원죄론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서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 아닙니다. 원죄론의 요점은 한 개인이 죄를 완전히 제어하거나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죄론은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원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원죄 교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주장입니다. 죄의 극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도 필요하지만 타인의 도움 또한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죄는 공동체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발생할 때가 있고 개인의 부족함이나 실수는 공동체의 도움으로 채워지거나 만회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죄를 용서하고 개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죄의 극복은 연대성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죄는 함께 제어하고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원죄론을 통해 사람을 죄의 본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 규정하면 그 개인은 공동체의 규율에 의해서 혹은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람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악한 존재가 아닙니다. 죄를 지으려는 악한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그림에 일부분이 어두운 색깔로 칠해져 있다고 그 그림을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그림이라고 정의를 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폭력이나 위협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원죄론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타인의 손길과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원죄론을 통해서 인간을 죄의 본성을 지닌 사악한 한 개인으로 규정하려는 오해를 버리고, 원죄론이 인류 공동체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셜리 거스리(Shirley C. Guthrie, Jr.)Christian Doctrine에서 원죄론이 거부되는 네 가지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Shirely C. Guthrie, Jr. Christian Doctrin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222-2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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