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노트

필리오케 논쟁이 갖는 의미

설왕은31 2021. 2. 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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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성령론-필리오케 논쟁

 

성령은 지금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 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도 우리 옆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령의 역할은 좀 더 긴밀합니다. 하나님도 과거에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고 미래에 오실 분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주로 과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그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과거와도 관련이 있지만 예수님은 주로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우리를 구원할 분이시죠. 다가올 앞날, 현재의 아픔과 고난을 말끔히 제거해 주실 분으로서 구원자 역할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신 분으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할 분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와 구별이 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 안에 계셨던 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구별되는 개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닙니다. 그가 우리 옆에 계시는지 앞에 계시는지 안에 계시는지 제대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지만 우리와 구별된 상태로 존재하는지 그것을 판단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20세기에 기독교 신학이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 성령론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에 대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힘을 받은 부분도 있지만 제 생각에 성령론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오기는 힘듭니다. 서구 사회는 오랫동안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형성해 왔습니다. 마치 서구 신학이 초기에는 신론, 그다음에는 기독론, 이제는 성령론이 중심에 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론이 중심이었습니다. 신론이 중심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성령론이 중심에 오기 어려운 이유는 성령론은 가장 추상적인 영역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주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로 구체적인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성령님은 가장 모호한 대상입니다.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령님처럼 모호한 대상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오기는 힘듭니다. 

 

성령의 여러 가지 역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로 말할 수도 있고 몇십 가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성령님이 할 수 있고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님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할을 이런 식으로 늘어놓는 것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중심 역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면 성령의 역할을 열거하는 것은 기억하기도 어렵고 성령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호해지기 쉽습니다. 

 

 

성령론에서 중요한 것은 '필리오케 논쟁'입니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면 성령은 성부로부터 출원(processions)합니다. 출원이라는 말도 영어로 보면 procession이고 그 의미는 '나온다'입니다. 말을 어렵게 출원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서방 교회는 6세기에 이 교리에 필리오케 filioque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필리오케는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령이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자로부터 출원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교회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동방 교회는 일단 서방 교회가 그들의 독단으로 필리오케라는 말을 덧붙인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 출원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필리오케 논쟁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왜 서방 교회는 필리오케라는 말을 첨가했는지, 그리고 왜 동방 교회는 그것을 반대했는지입니다. 서방 교회는 필리오케를 덧붙임으로써 성자와 성령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성자와 성령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고요. 동방 교회는 필리오케라는 말로 인해서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성령이 주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따른 종속적 역할을 함으로써 결국 성령론을 약하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밀리오리에 따르면 20세기에 이 논의에 대한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서방 교회가 독단적으로 필리오케를 집어넣은 것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게 되었고요. 둘째, 성령이 성자의 성부로부터 출원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타협점으로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셋째, 성령의 출원에 대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모두 그 신비를 완전히 풀어내지 못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참고 도서: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제10장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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