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노트

고난받는 하나님 (20세기 현대신학에서)

설왕은31 2021. 2. 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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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역사 속의 신학>에 나온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난받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새로운 정통주의가 된다고 맥그래스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난받는 하나님이 정통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인데요.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몰트만이 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입니다. 고난받는 하나님 개념이 20세기에 각광을 받고 정통으로 인정받는 이유에 대해서 맥그래스는 몇 가지 이유를 듭니다.

 

1) 저항적 무신론의 발생

세계의 고난과 고통 저 위에서 아무런 상관하지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죄한 어린아이의 고난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이나 반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도 무책임한 신에게 저항하고 반항하는 무신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몰트만 같은 저술가들은 상처받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저항을 유일하게 진지한 무신론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경향이 강한 무신론은 신뢰할 만한 신학적 반응을 요구했고, 그로써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죠.

 

2) 루터의 재발견

1883년 루터 탄생 400주년 행사를 통해 루터 저작의 재출판이 착수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저작을 다시 읽게 되었고 독일 신학계의 루터 연구 부흥이 이루어졌는데요. 그 중에서도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재조명되었습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비교했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능력, 지혜를 인식하는 신학을 의미하고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학을 의미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다는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3) 교리사 연구 운동의 영향

교리사를 연구하는 운동이 19세기 막바지에 절정에 달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적 신론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 관심이 기울려졌습니다. 또한 저항적 무신론에 대항하여 고난받고 고통받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교부 시대의 신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을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받을 수 없다는 주장은 거짓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4) 구약에 대한 새로운 연구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예언자들의 하나님이라 프리다임의 하나님의 고난과 같은 구약 연구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슬픔을 공유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방식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에 의해 상처를 입고 고통당할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5) 사랑의 개념에 대한 연구

무감각적 선의가 사랑일 수 있느냐 의문을 제기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고통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는데요. 아퀴나스가 이 부분에 대해서 잘 말한 것 같습니다. 고통 없이 사랑은 없다고 말했죠. 사랑에는 고통이 늘 함께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죠.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피하고 싶을 겁니다. 

 

Image by sathyatripodi from Pixabay  

* 더하는

몇 년 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거기에 사람의 감정을 다섯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중에 기쁨이와 슬픔이가 있는데요. 기쁨이는 항상 기쁘고 긍정적이고 슬픔이는 항상 슬프고 부정적입니다. 기쁨이는 불만이었죠. 슬픔이 때문에 항상 일을 망친다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에서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슬픔이의 역할이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슬퍼하는 사람 주위로 모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슬픔은 공동체를 만들죠. 그것은 슬픔이 전달되고 슬픔을 전달받는 사람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슬퍼하는 사람을 보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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