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로고스는 열 개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ground", "plea", "opinion", "expectation", "word", "speech", "account", "reason", "proportion", and "discourse") 각각의 철학 학파에서 로고스를 자신만의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로고스를 정교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곳에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로고스라는 말이 사용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는 '말'과 '이성', 그리고 저는 한 가지 더해서 '대화'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로고스라는 단어 자체는 신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 또는 신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로고스론의 창시자는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는 로고스를 '균형의 원리'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습니다.(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 13) 세상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불과 물, 여름과 겨울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늘만 있을 수 없고 불만 있어서는 안 되고, 여름만 있다면 세상이 존재할 수 없겠죠. 따라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모두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균형을 맞추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균형의 원리를 로고스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이 균형은 양팔저울이 평행을 이루듯 고정된 균형이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변하면서 균형이 깨지고 다시 구조가 생깁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불'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불은 사물들 사이의 결합을 녹이고 깨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가 인간 삶과 지식의 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균형이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죠.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말을 남긴 헤라클레이토스답습니다.
참고로 소피스트는 로고스를 대화discourse로 이해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대화'reasoned discourse나 '주장'argument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로고스는 이성을 사용해서 설득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나머지 두 가지 방법은 하나는 파토스이라고 다른 하나는 에토스입니다. 파토스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이고 에토스는 듣는 이의 도덕적 성품에 호소하는 것이죠.
성서의 저자 중 요한은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를 표현했습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ΚΑΤΑ ΙΩΑΝΝΗΝ 1:1 Greek NT: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개정)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 1:1, NRSV)
로고스라는 단어는 성서에서도 특별한 단어입니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번역본인 70인역은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라는 단어를 로고스라는 그리스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이 있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로고스는 곧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가 있었고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로고스가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신, 신의 본성, 신의 말씀, 신의 지혜라는 뜻을 모두 가질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역사로 인해서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라는 철학적 의미와 신의 본성이나 말씀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모두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로고스는 합리적인 구조와 창조적인 힘을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조직신학 III, 175)
철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로고스를 알아내야 하고 로고스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이기 때문이죠. 이는 이성, 지식, 균형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이성의 원리에 따라서 지식을 쌓고 또한 균형을 맞추면서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로고스가 인간 예수 안에 현존합니다. 우주 질서의 본질적 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로고스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로고스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삶의 원리가 있고 지식의 근원이 있다? 받아들이기 어렵죠.
결국 예수를 로고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로고스로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지혜라고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예수이고 로고스는 로고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괴테의 "동화"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무엇이 금보다 밝은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빛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무엇이 빛보다 더 신선한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대화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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