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참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바를 정'에 '옳을 의'를 쓰고 있는 정의는 바르고 올바른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바르고 올바른 것인지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런 말은 사전에 나온 설명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음 사전에서 찾아 보면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라고 나와 있는데 모호한 설명입니다. 영어로는 justice인데, 정의를 말할 때 옆에 영어로 표기해 주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뜻을 의미하는 정의는 definition이고 올바른 것을 의미하는 정의는 justice라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뜻으로 사용한 것인지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justice는 옥스포드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원을 찾아보면 justice는 법이나 올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국어 사전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폴 틸리히는 정의를 존재의 형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 역시 아주 명료한 설명은 아닙니다. 틸리히가 한 설명의 특징은 정의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존재의 형식이라는 설명에 따르면 정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형식이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정의에 대하여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랑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정의의 궁극적인 원리이다. 사랑은 재결합하게 한다. 그리고 정의는 재결합된 것을 유지시켜 준다. 이것이 사랑이 실현되고, 또 현실화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정의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는 '창조적인 정의'이다. 그리고 창조적인 정의는 헤어진 것들을 재결합하게 만드는 사랑의 아주 구체적인 모습이다. (사랑, 힘, 그리고 정의, 106)
틸리히는 정의의 원리를 몇 가지 제시합니다. 정의의 궁극적 원리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사실 사랑이 없으면 정의가 필요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 사이에 혹은 사람과 다른 존재 사이에 서로 결합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모이면 충돌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재결합된 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정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정의가 존재의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플라톤이 정의의 기능이 개인과 사회 그룹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언급하기도 하고 구약성서에서 정의의 원리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자연을 다스리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정의가 존재의 힘이 구체화되는 형식이라면, 우리가 앞에서 생각해 본 대로, 정의는 힘의 역동성을 제공하기에 충분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가 존재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적절한 형식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의가 존재의 형식이라는 말이 앞의 문장에서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즉 정의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형식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존재 사이의 만남이나 충돌을 전제로 합니다. 틸리히는 정의의 궁극적인 원리를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 이외의 정의 원리는 타당성과 평등을 들고 있습니다. 정의가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는 일종의 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막고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대표 형식이 법입니다. 법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틸리히는 정의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가장 기초적인 정의로 존재를 위한 정의이고, 둘째는 정당한 자기 몫에 대한 정의, 세 번째는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우리가 실현해야 하는 정의는 세 번째 정의인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창조적인 정의는 올바른 분배 정의보다 더 나은 정의입니다. 틸리히는 신의 정의가 때로는 정의로워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의 정의가 창조적인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정의는 사랑의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자연과 역사 속에 모든 것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신의 명령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규율과 명령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법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순종이다. (100)
정의를 존재의 형식으로 이해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반드시 법을 지키는 것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데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형식은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규율과 명령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은 사람의 생존과 번영과 행복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에 안식일에 관한 법이 그런 경우에 해당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먹을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예수는 이러한 규율에 따르지 않았고 이에 대해 지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틸리히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정의란 힘과 힘이 부딪칠 때 존재의 힘이 그 힘을 어떻게 실재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형식이 없는 존재의 힘이란 없기 때문에, 정의는 힘 속에 내재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의 힘이 다른 존재의 힘과 부딪칠 때마다 강압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2)
정의에 힘이라는 요소를 더하니 더 헷갈립니다. 이 내용을 통해 정의는 존재 사이의 충돌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 수 있고 충돌이 일어날 때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강압이라는 요소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압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고요.
틸리히는 사랑이 정의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함하고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자기 희생의 사랑은 정의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죠. 왜냐하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없앰으로써 사랑의 순간에 일어나는 재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요구입니다. 즉 사람이 사랑할 때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은 정의를 버리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기 포기를 통한 사랑이 때로는 사랑의 완성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랑은 책임감 있고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자아를 없애 버리려는 욕망일 뿐이다. 이 욕망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사람을 책임감 있게 만들어 다른 자아에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없애 버린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포기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에게 정의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포기는 다른 사람에게도 정의를 가져올 수 없다. (104)
정의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리는 않은 상태로 여러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함한다는 말은 사랑을 할 때 자기 자신에게도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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