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 신학

구원이란 무엇인가_틸리히신학

설왕은 PhD 2021. 5. 2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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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소외와 치유의 관점에서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이 소외와 치유를 의미한다면 완전하게 종결된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외는 극복되어야 하고 완전하게 극복될 수도 있겠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 발생할 수 있습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하 치유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치유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생깁니다. 

틸리히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이분법적인 구분을 반대합니다.

"비성서적인 교회론적인 구원관은, 구원은 전적으로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틸리히, 조직신학 3, 256)

 

구원을 받았든지, 아니면 받지 않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생각에 대해서 틸리히는 배척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구원을 소외의 극복과 치유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구원이 이분법적으로 구원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구분할 수 있다면 소외의 극복이 완전히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외의 완전한 극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소외의 극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치유는 없습니다.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구원의 개념에 대해서 틸리히는 비성서적인 구원관이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않는다는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구원관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통한 치유의 특별한 성격은 무엇인가? 만일 그가 구원자로서 받아들여진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대답은 그를 떠나서는 어떠한 구원하는 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모든 치유와 구원 과정의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3, 256-57)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소외의 극복이나 치유 모두 그리스도인게도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완전한 소외 극복이나 완전한 치유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틸리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는 극복이나 치유의 능력에 있어서 기존의 상대성의 상태를 능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차이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외에 구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질문은 나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아니다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면 예수가 이제껏 강조해왔던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에 반하는 대답이고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간음의 죄를 가볍게 생각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나쁜 의도를 가진 나쁜 질문입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나쁜 질문에 속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식의 선택을 강요하는 질문은 나쁜 질문입니다. 어떤 쪽을 선택해도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외에 구원이 있느냐라는 질문도 나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그렇다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독특한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라고 의심받을 테고, 아니라고 한다면 타종교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함은 타인을 포용하기 위함이지 타인을 배척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음으로써 타인을 배척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타인을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타인에게 문을 여는 사람이 돼야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담을 높게 쌓아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타인을 배제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으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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