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인간의 심연에 깔려 있는 인간 본성의 핵심은 '죄'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죄인이라고 판단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틸리히는 좀 다른 주장을 하는데요. 아주 간단하게 말을 합니다.
"실존은 소외이다." (조직신학 III, 74)
소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존재의 근거로부터 소외, 둘째, 타인들로부터 소외, 셋째,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 이렇게 인간은 다차원적 소외를 겪고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관점입니다.
특별히 첫 번째 관점으로 보면 소외와 죄의 개념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죠. 틸리히가 죄라는 말을 꺼려 하는 이유는 '죄'의 개념이 성서에서 본래 의미하고자 하는 바와 아주 무관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대체로 도덕법의 위반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틸리히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바울은 죄를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사-인격적인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도덕법의 위반과는 거리가 멀죠.
저도 이 점에 있어서 틸리히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데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선악과를 먹는 것은 도덕법과는 정말 무관합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죄는 어떠한 행위를 죄로 만드는 법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들과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인간 소외의 표현이다." (조직신학 III, 77)
소외는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소외의 극복은 재결합입니다.
틸리히는 크게 세 가지 소외를 언급합니다. 불신앙으로서의 소외, 휘브리스(Hubris)로서의 소외, 욕망으로서의 소외, 이렇게 세 가지 소외입니다. 불신앙으로서의 소외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요. 욕망으로서의 소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자신의 것으로 집어삼키려는 욕망으로 인해 생기는 소외를 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틸리히의 독특한 관점이 바로 휘브리스(hubris)로서의 소외입니다. 휘브리스는 자기 높임을 의미합니다. 틸리히는 교만과 자기 높임을 구분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한한 신의 영역으로 자기를 높이는 것을 휘브리스라고 합니다. 독특한 것은 휘브리스는 교만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겸손의 행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III, 83) 불신앙이 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휘브리스는 신을 없애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행위입니다.
다른 두 가지 소외도 위험하지만 휘브리스는 교묘하게 빠져들기 쉬운 측면이 있습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성적인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적인 자기-긍정과 파괴적인 자기-높임 사이를 혼도하도록 이끌어 간다. (조직신학 3, 84)
인간에게는 자기 긍정이나 삶의 긍정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와 같은 자기 긍정은 자기 높임으로 빠져 버릴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유한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불안이나 불확실성, 실수와 고독 같은 것을 모조리 부인해 버리는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소외로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죠.
'틸리히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직신학] 어떻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었나? (틸리히) (0) | 2021.05.27 |
---|---|
믿음이란 무엇인가?_틸리히 신학 (0) | 2021.02.08 |
기독교 신학의 토대_틸리히 신학 (0) | 2021.02.08 |
신학의 대상_틸리히 신학 (0) | 2021.02.08 |
[책소개] 새로운 존재, 예수 그리스도_틸리히 설교집 "새로운 존재" (0) | 2021.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