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는 신학의 대상에 대해서 두 가지 형식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1. 신학의 대상은 우리와 궁극적으로 관계된 것이다. (The object of theology is what concerns us ultimately.)
2.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의 존재나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Our ultimate concern is that which determines our being or not-being.)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이란 성서에 나온 다음과 표현과 그 의미가 같다고 설명합니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29)
신학의 대상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끌어당기는 그러니까 "궁극적이고 총체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어떤 대상이라고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틸리히는 "궁극적인 것은 오직 궁극적인 관심의 태도를 가진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틸리히, 조직신학 I, 27)
틸리히의 설명은 기존의 설명보다 좀 더 구체적입니다.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다음 질문은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
틸리히는 신이라는 표현 대신에 "궁극적으로 우리와 관계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틸리히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과 예비적인 관심을 구분합니다. 궁극적인 관심의 반대말이 예비적인 관심입니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과 예비적인 관심은 세 가지 관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서로 무관심한 관계, 둘째 예비적인 것이 궁극적인 것으로 격상되는 관계, 셋째, 예비적인 관심이 궁극적인 관심의 매개가 되는 관계,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데 우리가 결국 종교적인 관심 혹은 우리 존재의 근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관계는 우상 숭배입니다. 예비적인 관심이 궁극적인 단계로 격상되는 것인데 아주 사소한 것이 우리의 존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틸리히는 세 번째 관계를 지지합니다. 예비적인 관심은 궁극적인 관심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그림, 시, 음악과 같은 것이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는 이러한 것들이 매개가 되어서 결국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한 측면에서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는 "인간 실재의 전체와 실존의 구조와 의미와 목표"를 의미합니다. (틸리히, 조직신학 I, 31)
이런 의미에서 틸리히는 신을 존재의 근원(the ground of being)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은 인간의 존재를 흔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폴 틸리히, 조직신학 I,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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