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틸리히는 이 점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이야기, 즉 신학은 기독교 안에만 존재할까요, 아니면 기독교 밖에도 존재할까요? 물론, 신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신학 바깥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아주 보편적인 존재이니까요. 그러나 틸리히는 신학이 기독교 신학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회 바깥에 구원이 있냐, 없냐의 문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서 신은 완전히, 최종적으로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틸리히는 스스로 변증신학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틸리히는 "변증 신학은 모든 종교와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물음들이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대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틸리히, 조직신학 I, 33)
틸리히에 따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로고스는 보편적인 것이며, 육신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가장 구체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토대입니다. 틸리히는 기독교 신학이 "절대적인 구체성과 절대적인 보편성 사이의 긴장 위에 근거하는 있는 한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틸리히, 조직신학 I, 35) 이러한 긴장 관계에 있는 신학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이런 근거에서 틸리히는 기독교 신학만이 유일한 신학일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토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이 된 로고스 (Logos who had become flesh)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어난 아리우스 논쟁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리우스는 반-신 예수를 주장했습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예수는 인간보다는 나은 존재이고 신보다는 못한 존재입니다. 매우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예수가 바로 이런 위치입니다. 예수는 인간보다는 비범한 것이 맞는 것 같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좀 아래에 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도식에서 예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도 없고 가장 구체적인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아리우스와는 반대로 아타나시우스 쪽에서는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고 예수는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신이라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만 보편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편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만 할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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