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 신학

믿음이란 무엇인가?_틸리히 신학

설왕은31 2021. 2. 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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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믿을 때 의심해도 될까요? (의심의 역할)

 

믿음은 '충분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거가 충분히 많이 있으면 보통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사실인 것이죠. 어떤 대상과 상호관계를 맺을 때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고 사실 관계로 끝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집 정원에 핀 장미꽃은 붉은색이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 장미꽃이 붉은색인지 아닌지 믿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확인하면 됩니다. 확인했는데 붉은색이면 사실인 명제이고 붉은색이 아니면 거짓인 명제입니다. 보통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믿음을 요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신뢰할만한 증거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사람은 또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믿음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믿음이 필요한 것의 수백 배 수천 배 더 믿음이 필요한 관계가 인간과 신의 관계일 것입니다. 일단 인간의 오감으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감지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공기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힘을 빌려서 측정과 실험을 통해 공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듭니다. 

 

 

틸리히는 믿음을 설명하면서 '의심'이라는 요소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은 늘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의심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의심은 보통 죄악시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실례인 것이죠. 신앙심이 부족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늘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의심은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믿음을 설명하는 그의 책 제목을 '믿음의 역동성'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고정된 신뢰 체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에 의해 도전받고 끊임없이 재구성되야 한다는 관점이죠. 틸리히의 입장에서 신은 믿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의심의 대상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하지만, 믿음이 발전한다고 의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드시 같이 존재합니다. 

 

틸리히는 믿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신뢰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쓰지 않습니다. 틸리히는 믿음이란 '궁극적 존재에 대한 궁극적 관심'입니다. 신뢰 대신 관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관심은 신뢰보다는 훨씬 약한 단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의심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뢰는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이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돈을 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꼭 돈을 갚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신의 행동을 예측한다면 그 예측은 빗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신뢰라는 말보다 훨씬 중립적인 단어로 관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긍정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열광적인 신앙인도 있지만 반대로 열광적인 무신론자도 있습니다. 그런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열렬한 무신론자도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신에게 무관심한 사람보다는 진지하고 열렬한 무신론자가 훨씬 더 신앙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에게 극렬히 반대하는 사탄이 신에게 무관심한 사람보다 더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오류를 막아주는 관형사가 '궁극적인'입니다. 이 관형사는 믿음이 단지 어떤 일에 찬성, 반대하거나 인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와 동조를 뜻한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확신을 가지고 참여할 수도 있고 의심을 하면서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틸리히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신뢰나 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여와 동조인 것이죠. 예상대로 안 될 것 같아도 동조하는 것이 믿음이고,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신뢰할 수 없지만 참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틸리히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틸리히의 설명은 어렵지만 우리가 믿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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