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러셀서양철학사

[철학박사/러셀] 호메로스를 읽을까 말까? (3/365)

설왕은31 2022. 8. 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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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서상복 옮김 "러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2009) p. 40-45

 

그리스가 눈부신 고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문자 기술의 획득이었다. 러셀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이 언제 알파벳 문자를 획득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스인들보다 더 오래전에 문명을 발전시킨 크레타인과 페니키아인, 그리고 이집트인들도 문자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이 이들보다 더 뛰어났던 것은 모음을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언어를 문자로 쓸 수 있게 되면서 그리스의 문명은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이 문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단순히 의사소통만 했다면 그들의 언어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정말 다행하게도 인류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문학 작품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다. 호메로스가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 시인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러 명의 시인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면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550년까지 200년 동안 서술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호메로스는 한 명의 시인으로 이미 기원전 8세기 말에 완성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 생각으로는 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학 작품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이제 막 문자 기술이 개발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같은 작품을 한 사람이 썼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그때는 컴퓨터도 없었는데 말이다.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든 아니면 여러 명이든 간에 그 작품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에는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 당시부터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배우고 암송했으며 청년층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즉 기원전 6세기부터 한참 동안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엘리트 청년 교육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였다는 사실. 

 

호메로스의 시는 중세 후기의 궁정 소설과 마찬가지로 교양을 갖춘 귀족 계급의 관점을 대표하며,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온갖 미신을 서민적이고 비속하다고 해서 무시한다... 호메로스는 원시성과 거리가 먼 검열관의 위치에서 고대 신화들을 정리한 18세기식 합리주의 해석자이며, 상류층에 어울리는 도시풍의 세련된 계몽적 이상을 간직했다. (42-43)

 

Homer as depicted in the 1493 Nuremberg Chronicle

 

이런 면에서 볼 때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 교육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미신과 원시 신앙으로 인해 저질러진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악행들이 많았기 때문에 호메로스를 읽는 것이 그런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정신 교육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거나 인육을 먹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메로스는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신들은 전혀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신들이 하는 일도 없다. 생산을 증진시켜서 풍요로운 수확을 얻게 한다든가 정의를 위해서 싸우지도 않는다. 신에게 사람은 그저 열등한 존재이고 만약에 사람이 신에게 도전한다면 신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신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잔치를 벌이고 술 마시고 놀고 웃고 노래하는 것뿐이다. 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시로 거짓말도 한다. 호메로스에 나온 인간 영웅도 선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찾아야 할 진정한 종교심은 올림포스의 신들보다는 오히려 숙명이나 필연, 혹은 운명과 같은 더욱 어둡고 실체가 없는 존재와 관련이 깊은데, 제우스조차 이에 복종해야 한다. (44)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

 

이런 면에서 볼 때 호메로스를 읽는 것이 어떤 이로움을 줄지 잘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의 청년이라면 이 작품을 읽고 이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갖가지 미신이나 사악한 종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교육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일단 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신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신들은 눈곱만큼이라도 존경할 부분이 없는 것 같다. 만약에 주변에 잘못된 미신이나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호메로스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러셀이 평가하듯이 18세기식 합리주의 해석을 담고 있는 호메로스는 아마도 18세기까지는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계몽주의도 중세의 어두운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부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호메로스를 읽을 필요가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계몽주의 이후로 인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 왔고 그러한 이해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은 많이 있다. 굳이 2500년 전에 완성된 글을 통해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호메로스의 역사적 가치나 영향력은 부인할 수 없다. 서양 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 있어서 독특하고 탁월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많이 내서 이 작품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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