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러셀서양철학사

[철학수업/러셀] 오르페우스는 누구인가? ( 5 )

설왕은31 2023. 2. 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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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2009) p.50-57

 

오르페우스는 생소할 수 있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대단한 철학자 못지않다. 그는 플라톤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매우 야만적인 종교를 순화시켰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은 따로 서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지대했다. 디오니소스는 니체를 통해서 20세기에 다시 주목받았다. 니체가 아니었어도 육체의 본능에 충실한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현대 시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세상을 즐기는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단지 술을 마시고 세상을 즐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원시 종교들이 대체로 다 그러했듯이 디오니소스 숭배는 야만적 요소가 배어 있어서 보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당연히 이런 형태의 종교가 철학자에게 좋은 느낌을 주기는 어렵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 숭배가 가지고 있었던 야만적인 모습을 벗겨 내고 그 안에 담긴 사상을 취해서 정신적인 형태로 변모시켰다. 육체적 디오니소스 숭배는 술에 취해 육체적 본능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지만 정신적 디오니소스 숭배는 오히려 금욕적인 자세로 육체적 본능을 자제하고 정신적 고양을 통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추구한다. 오르페우스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신과 연합하는 경지에 이른다고 생각했던 디오니소스 숭배의 전단계를 빼고 최종 단계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오르페우스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해서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신화 속 인물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르페우스가 종교 개혁가라는 주장도 있으며 바쿠스의 신앙에 빠진 무녀들이 그를 찢어 죽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러셀은 그를 종교 개혁가이자 사제이자 철학자라고 평가한다. 

 

오르페우스가 무엇을 가르쳤든 간에, 오르페우스교도들이 따른 교리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영혼이 윤회한다고 믿었으며, 영혼은 여기 지상의 생활 방식에 따라 내세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기도 하고, 영원하거나 일시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정결을 목표로 삼았는데, 일부는 정화 의식을 통해 일부는 특정한 부정을 피함으로써 깨끗해지려고 했다. (51)

 

오르페우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그의 아내

 

오르페우스교의 석판들이 발견되어서 오르페우스교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지침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가르침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영혼이 마시면 안 되는 물은 망각을 일으키는 레테의 강물이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기억의 강물, 므네모시네 강물을 마셔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망각을 해서는 안 되고 기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오르페우스교는 기억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을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르페우스교는 그 고통을 참고 견뎌야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르페우스교는 금욕적인 성향을 띄면서 신과의 합일이라는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했는데 이는 피타고라스를 거쳐서 플라톤 철학에 유입되었다. 오르페우스교가 가진 특징 중 하나가 여성주의 색채이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쿠스를 숭배하는 종교 의식의 특징적인 몇 가지 요소는 오르페우스교의 영향권에 속한 전 지역에서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여성주의 색채인데, 여성주의는 피타고라스의 사상 속에 더욱 짙게 나타나며, 플라톤의 철학 속에서는 여성들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남성과 완벽하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피타고라스는 "성의 측면에서 여자들은 본래 경건함과 더욱 가깝게 타고 났다"고 말한다. (54)

 

그리스인들은 침착하고 평정심을 보여주는 사상가와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에 바쿠스교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정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쿠스교에서 보여주는 육체적인 정열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지만 오르페우스교가 가졌던 정신적인 정열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교가 보여주는 정신적인 정열은 즐거운 것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결국 신과 연합하는 경지에 이르러 고통을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염세주의 경향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세상과 육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견해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옮겨 간다. 플라톤의 철학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세상과 육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은 벗어나야 하는 곳이고 육체는 방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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