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2009) p.68-78
러셀은 피타고라스를 아주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우리에게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친숙한 이름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든 사람이 피타고라스라면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단순한 수학자가 아니었다. 수학자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데 그가 특별한 수학자인 이유는 수학이 없는 시대에 수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있는 시대에 수학자가 되기는 쉬워도 수학이 없는 시대에 수학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그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수학은 주로 연역 논증을 하는 학문인데 이와 같은 논증 형태를 피타고라스가 처음 만들었다면 그의 위대함은 이것으로도 충분히 인정해 주어야 한다.
증명하는 연역 논증이란 뜻의 수학은 피타고라스와 더불어 시작되며, 색다른 형태의 신비주의 사상 역시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68)
피타고라스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는 사모스 섬 출신으로 기원전 532년 경, 즉 기원전 6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사모스 섬은 폴리크라테스라는 참주가 지배했는데 그는 매우 악명 높은 지도자였다. 사모스는 밀레토스와 경쟁 상대에 있었는데 폴리크라테스는 아주 비도덕적이었으며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피타고라스는 폴리크라테스 정권을 혐오하여 사모스를 떠났으며 자신의 사상을 확립한 곳은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이었다. 크로톤에서 제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어 영향력을 행사하던 피타고라스는 크로톤 시민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의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해 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수학자들로 구성된 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고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인물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는데 주요 교리는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과 콩을 먹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기원전 6세기 경이면 아직 종교와 철학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발견한 수학의 원리와 철학적 가르침이 결국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 교단의 규칙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콩을 먹지 말라.
2. 떨어뜨린 물건을 줍지 말라.
3. 흰 수탉을 건드리지 말라.
10. 심장을 먹지 말라.
11. 큰길로 다니지 말라.
14. 불빛 옆에서 거울을 보지 말라.
콘퍼드는 피타고라스 사상이 오르페우스교의 개혁 운동이고,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개혁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피타고라스는 현대 철학의 시작을 도운 아주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대립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자주 나타났는데 피타고라스에게는 이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신비주의 경향이 더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피타고라스를 지성적 신비주의자로 부르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수학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나 신기한 발견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고귀한 활동이었다. 수학이란 일종의 사색 활동인데 따라서 수학을 통해 발견한 이론theory이란 일종의 법칙이 아니라 신적 영감을 받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다. 이론은 오르페우스교의 고유한 말로써 콘퍼드는 '정열과 공감에 휩싸인 관조'로 해석한다.
피타고라스에게 '정열과 공감에 휩싸인 관조'는 지성적 관조이며 결국 수학적 인식에 해당한다. 이로써 '이론'이라는 말은 피타고라스 사상을 거치면서 점차 현대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는 이론이라는 낱말이 황홀경 속에 드러난 계시적 요소를 그대로 지녔다. (73)
이론theory에서 theo는 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색을 의미하기도 하는 말인데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 사상과 이론이 관련이 있는 말이라면 '신'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세상에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올림픽 경기에 모인 세 종류의 사람들과 같다고 보았다. 가장 낮은 계급은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고 그 위는 선수들로 경기에 참가하는 자들이고 가장 높은 계급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즉 관조하고 사색하는 사람들을 가장 높은 계급이라고 여겼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이다"라고 주장했다.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에 닿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결국 약분할 수 없는 수를 발견했다는 데서 인간이 만든 숫자에 대한 한계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수학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하학이 철학이나 과학의 방법에 미친 영향은 뿌리 깊고 의미심장했다. 그리스인이 체계를 세운 기하학은 자명한 공리들Axioms에서 시작하여, 연역추리를 통해 조금도 자명하지 않은 정리들로 나아간다... 미국독립선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을 본떠 주장한 셈이다... 개인적 성향의 종교는 무아경에서 도출되고, 신학은 수학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무아경과 수학은 둘 다 피타고라스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 (76-77)
신학이 수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원한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수학이 나왔고 이 수학에서 신학이 나왔다는 것이다. 신학이 있기 전에 오히려 수학이 있었다는 것이고 수학이 믿었던 영원한 진리가 결국 신학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수학과 신학의 결합은 칸트에 이르기까지 종교 철학의 특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는 중요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또한 플라톤 사상으로 알고 있던 것도 더 분석해 보면 실제로 피타고라스 사상인 것이 많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도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한 사람 정도로 가볍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피타고라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여기지는 못했을 것이며, 신학자들 역시 신과 영혼의 불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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