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러셀서양철학사

[러셀철학수업] 파르메니데스

설왕은31 2023. 4. 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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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는 유명하다고 해야 할까, 유명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 좀 헷갈린다. 나는 파르메니데스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2000년 동안 주로 형이상학적 철학을 발전시킨 서양 철학의 아버지 격이라고 해야 할까? 플라톤 이전에 누가 있었느냐라고 물어본다면, 피타고라스보다는 파르메니데스가 더 많이 언급될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수학 공식이 있기 때문에 유명하기는 하지만 철학 쪽에서는 그리 언급되는 인물은 아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반대편에 있는 철학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변한다고 주장하고 파르메니데스는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기원전 5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이다. 러셀은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기원전 450년경)에 당시 노인이었던 파르메니데스와 대담을 나누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의 대담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지 않아도 명명백백하지만, 플라톤 자신이 파르메니데스 학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추론해도 좋으리라. (92)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을 형성하게 된 맥락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은 '자연론'이라는 시에서 설명된다고 한다. 그는 감각이란 본질이 아니고 일종의 환상이며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자 the One은 유일하게 참된 존재이며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는 무한 존재로서 분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자 안에는 어떤 대립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뜨겁다와 차갑다와 같은 대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헤라클레이토스이고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는 뜨겁다와 뜨겁지 않다가 있을 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자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존재로 여겼다. 특이하게도 파르메니데스는 일자는 구형이라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와 언어에서 시작해서 세계 전체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를 한 첫 번째 철학자이다. 사실 파르메니데스가 한 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논리적이라고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에 대해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된다. 당신이 생각할 때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고, 당신이 명사를 하나 사용할 때 명사는 어떤 존재에 대한 명사여야 한다. 따라서 사유와 언어 바깥에 있는 대상들이 꼭 필요하다. 또 당신은 어떤 사물에 대해 이때나 저때나 생각하고 말할 수 있으므로, 사유의 대상이나 말하려는 대상은 무엇이든 항상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서 변화란 존재하게 되거나 존재하지 않게 되는 사물에서 일어나므로,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93-94)

 

언어나 사유의 대상이 항상 실제로 존재한다는 전제도 동의하기 어렵고 마지막 문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러셀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러한 주장에 어떠한 진리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자고만 한다. 사실 이 부분을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역시나 말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러셀은 어떤 사람이 조지 워싱턴을 언급하면서 말을 한다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둘 중에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말의 대상인 조지 워싱턴이 지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실제로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므로 전자는 아예 말이 안 된다. 그나마 후자는 말이 된다고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후자의 관점으로 설명을 한다. 나는 이것 역시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중간중간에 가정한 전제들에 오류가 없어야 그나마 논리적으로는 안정된 결론에 이르는데 그러한 검증 과정이 없어서 검토할 만하지 않은 것 같다. 

 

그 후 철학이 꽤 현대에 이른 시기까지도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수용한 사상은 역설의 극단을 보여준 모든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체의 불멸성이었다. '실체'라는 말은 바로 뒤를 이은 후계자들에서 분명하게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그 개념은 이미 그들의 사변 속에 드러나 있다. 실체는 변하 술어들이 부여되는, 지속하는 주어로 가정되었다. 실체는 있는 그대로 2000년 이상 존속하면서 철학, 물리학, 심리학, 신학의 근본 개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98)

 

 

실체 또는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계속 궁금해왔다.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세상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18세기에 칸트가 사물의 본질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20세기 현상학이 나타나면서 그 주장은 더 힘을 받았다. 실체라는 것, 그것이 인간의 실체이든 세상의 실체이든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따라서 실체나 본질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줄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20세기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래도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실체에 대한 관심은 2000년 이상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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