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러셀서양철학사

[러셀철학수업] 아테네의 문화

설왕은31 2023. 6. 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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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치른 두 차례의 전쟁에 승리를 한 이후부터 대번영의 시기를 맞는다. 기원전 490년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기원전 480-479년에는 다리우스 왕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면서 아테네는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아테네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대 페르시아 동맹을 결성할 때 아테네는 그리스를 이끄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번영은 페리클레스의 영도 아래 절정에 달했다. 기원전 460년경부터 430년경까지 약 30년 동안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의 선거의 결과에 의해 아테네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스의 비극이 유명한데, 이 당시에 활동했던 작가로는 아이스클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있다. 이 당시 비극 작가들이 유명한 이유는 기존의 작가들과는 달리 호메로스의 주제 밖으로 벗어난 이야기를 서술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스클로스의 "페르시아인"은 크세르크세스의 패배를 다루고 있고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후반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암흑시대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다양한 주제와 시대에 대한 시각을 보여 주었다. 비극 작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작가였는데 그의 작품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조롱하기도 해서 그런지 후대에 자주 언급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러셀은 페리클레스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가 이룩한 성취와 업적은 어쩌면 온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웠으리라...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 노예를 포함한 인구가 약 23만 명으로 추산되며, 시골 아티카 주변의 영토에는 아마 더 적은 인구가 살았을 것이다. 이전이든 이후이든 어떤 지역의 그만한 인구수로 착수한 일이 그토록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08) 

 

 

페리클레스

 

이 당시에 아테네는 두 명의 탁월한 철학자를 배출했다. 바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는 청년기와 장년기 초반을 페리클레스의 통치 아래서 보냈다. 아테네인들은 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다른 도시국가 출신 교사들의 말도 경청했는데 이 당시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부류가 바로 소피스트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그들에게 매달리는 학생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아테네가 물질적으로 번영했던 시기였으므로 사람들도 철학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이 당시의 젊은이들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과학, 수학, 철학 연구에 힘을 기울였고 호메로스의 시를 거의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번영의 시대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아테네를 위협에 빠뜨린 것은 안으로는 민주 정치 밖으로는 스파르타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이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도입해서 귀족과 농부와 도시의 장인 사이의 타협점을 찾았다. 참주 정치 아래에서도 민주적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참주정치가 종말을 맞았을 때도 민주정치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 생애 말년에 민주정치를 이끈 지도자들이 권력의 몫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 정책이 스파르타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완패하면서 패권을 내주게 된다. 

 

정치 체제가 붕괴했는데도 아테네의 특권은 유지되어, 거의 천 년간 아테네는 철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알렉산드리아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아테네를 능가했지만, 아테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활약으로 철학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도시가 되었다. (109)

 

재미있는 사실은 플라톤이 활약했던 아카데미는 다른 모든 학파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로마 제국이 국교를 그리스도교로 정함에 따라 이교 사상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허용되는 곳이 바로 플라톤이 있던 아카데미였다. 이 아카데미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된 이후에도 200년 동안 이교 사상이 함께 논해질 수 있었지만 기원후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 아카데미를 폐쇄했다. 러셀은 이 시점을 시작으로 유럽에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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