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서양철학사(을지문화사, 2009) p.166-169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누구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 플라톤일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플라톤에게 반대하는 듯한 주장을 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도 막강했지만 플라톤의 영향력이 더 큰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러셀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라는 점, 다른 하나는 중세 시기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사상이 플라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러셀에 따르면, 플라톤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다섯 가지다. 첫째, 이상향 이론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둘째, 이데아 이론이다. 이데아는 보편자를 다루는 것인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토론 거리이며 이 문제를 처음 다룬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셋째는 영혼 불멸 이론, 넷째는 우주론, 다섯째는 상기로 간주되는 지식 개념이다.
러셀은 플라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러셀은 플라톤을 나쁜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플라톤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경외하는 마음은 거의 품지 않고 마치 그가 현대의 영국이나 미국에서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인 양 다룰 것이다. (167)
전체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이 끝난 것이기 때문에 만약 플라톤을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판단한다면 그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한다는 말과 같다. 즉 러셀은 플라톤을 나쁜 철학자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나쁜 철학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기원전 5세기 더 정확히 말하면 기원전 428년과 427년 사이에 아테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30인 참주 정치에 관련한 인물이 여럿 있을 정도로 그의 가문은 대단한 가문이었다. 그가 나쁜 철학자가 된 이유는 그가 태어난 시기 그리고 태어난 지역 그리고 그의 가문의 영향이 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태어난 플라톤은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기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가 아테네의 정치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였고 따라서 그는 민주주의가 별로 좋지 않은 제도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민중의 선택에 의해서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는 더 커졌을 것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중에서는 쓸 만한 것이 꽤 많이 있고, 또한 플라톤은 자신의 이론을 꾸미는 기술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의 철학을 좋아했고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러셀은 플라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이렇게 네 사람을 든다. 또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피타고라스를 통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거쳤든 거치지 않았든 자신의 철학에 스며든 오르페우스교의 요소를 피타고라스에게서 이끌어냈는데, 종교적 경향,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 내세관, 사제와 같은 어조, 동굴의 비유에 포함된 모든 가르침뿐만 아니라 수학을 중시하는 성향이나 지성과 신비주의가 밀접하게 혼합된 특징이 피타고라스에게서 유래했다. (167)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철인 정치나 과두정치이다. 그가 제시한 정치 형태는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다. 지혜를 아는 사람 또는 영원한 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또는 몇몇의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올바로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일단, 플라톤의 이론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영원한 선'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을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하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플라톤은 지성 훈련과 도덕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훈련을 받아야 선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서 플라톤은 수학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주장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훈련을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먹고사는 데 바쁜 사람들은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평범한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매우 시건방지고 편협한 기득권 계층의 짧은 머리에서 나온 독선적 이론이다.
러셀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플라톤과 현대 사상을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일반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지혜'와 같은 덕이 존재하는가? 둘째, 지혜가 존재한다면 정치권력이 지혜를 실현할 정치 체제를 고안할 수 있는가? (168)
이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다 보면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영원한 선이 존재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영원한 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일단, 영원한 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선이라고 누가 판단을 내릴 것인가? 판단을 내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의를 이끌어 낼 것인가? 그리고 누구나 다 그 영원한 선의 실현을 위해서 협력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사람들은 선이 무엇인지 알면 그 선을 행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살인이 악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걸까? 정치의 목적은 영원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현실적인 목적은 사람들 사이에 욕구와 욕망이 충돌하는 것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영원한 선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정치를 맡길 수 있을까?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족 계급이 언제나 현명하지는 않으며, 왕이 어리석은 경우도 흔하고, 교황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존재라고 했지만 극악한 오류를 저질렀다. 어느 누가 정권을 대학 졸업자들, 아니 신학 박사들에게 맡기는 일을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큰 재산을 모은 사람에게 맡기는 일을 지지하겠는가? (169)
정리하자면, 영원한 선은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고 또한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길 일도 만무하다는 점에서 러셀은 플라톤을 비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와 같이 러셀은 플라톤을 무시한다. 현실을 모르는 위험한 철학자라고. 그의 뜻을 그대로 펼쳐낼 수 있었다면 전체주의가 더 빨리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천오백 년 전 사람이 이렇게 많은 철학적 업적을 일구어냈다는 점은 대단하다. 그리고 그의 많은 이론이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사람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향과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한 정치 체제에 대한 제안이 실현되지 않고 이론으로 그쳤기 때문에 그가 오랫동안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자리 잡은 지금, 어떤 천재가 나타나더라도 그 사람에게 정치를 완전히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론은 영원히 구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플라톤에게는 오히려 행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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