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는 그리스 사상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가 멸망했으니까. 하지만 러셀에 따르면, 실제로는 스파르타는 그리스 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플라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것만으로도 그리스 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스파르타는 후대의 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별히 루소와 니체의 철학을 비롯한 국가사회주의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스파르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국가 중심의 법을 만들고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라코니아는 스파르타의 수도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부 지역을 가리킨다. 스파르타인들은 도리아족으로 북방에서 침입하여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모두 노예로 삼았다. 스파르타인들은 땅을 전부 소유했으나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겼고 언제든지 전쟁에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았고 이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스파르타 남자는 제각기 한 구획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경작하지 않았으므로 노예가 농사를 지었다. 노예들도 그리스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노예 상태를 비통하게 여겨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고 스파르타인이 노예를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철저하게 국가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했으며 전쟁 준비에 철저했다. 스파르타의 시민은 오로지 전쟁과 관련된 일을 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훈련을 받았으며 병약한 아이는 버려졌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큰 학교에서 다 같이 훈련을 받았으며 스무 살이 되면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서른 살까지 남자 기숙사에 살아야 했고 만약 결혼을 하더라도 은밀하게 결혼 생활을 해야 했다. 여자들도 남자들과 비슷하게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소년이나 소녀 모두 벌거벗은 채로 같이 체력 단련을 하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전쟁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세셰 문명에 이바지한 것이 거의 없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스파르타 국가는 나치가 승리했더라면 이룩했을 법한 국가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157) 이렇게 스파르타의 국가 체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데 반하여 그리스인들에게는 스파르타가 다르게 보였던 듯싶다. 러셀은 베리가 쓴 '그리스 역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테네나 밀레토스에서 온 이방인이 성벽도 세우지 않고 외관도 꾸미지 않은 도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을에 들어서면, 인간이 더 용감하고 더 선량하고 더 순박하고 부로 망가지지 않고 사상으로 방해받지 않던 오래전 옛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정치학에 대해 사색하는 플라톤 같은 철학자에게 스파르타 국가는 이상에 가장 근접한 듯이 보였다. 평범한 그리스인도 스파르타를 수수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직, 도리아 풍 신전만큼이나 당당한 도리아풍 도시, 자신의 거처보다 훨씬 더 고귀하지만 살기가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은 도시로 바라보았다. (157-158)
다른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스파르타에게 부러워했던 것은 스파르타의 안정성이었다. 다른 도시들은 혁명을 겪었지만 스파르타는 정치 체제가 전복되지 않고 수 세기를 버텼으며 왕을 견제하는 감독관의 권력이 점차 더 커졌다고 한다.
일부 그리스인들이 스파르타를 부러워했지만 실제로 스파르타의 현실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스파르타는 이론적으로는 꽤나 이상적인 도시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법과 규칙을 적용한 현실에서는 부작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실제로 뇌물을 안 받는 스파르타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한다. 스파르타인은 땅에 배분되어 있었고 거기에 나오는 소작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고 검소한 삶이 장려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스파르타에는 성적인 문제도 많았고 반역자도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스파르타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으면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가 동맹을 맺으려고 할 때마다 스파르타 때문에 실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에 대해서 아예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는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여자들을 소홀하게 다루었으며 여자들은 무절제와 사치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호전적인 민족의 부인들이 지배를 하게 되면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여자들은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렸으며 스파르타의 법에 따르지 않았고 법을 따르도록 강제력을 행사했지만 여자들이 저항하자 포기했다고 한다. 법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규제했지만 실제로는 부를 탐했고, 엄격한 통제를 견디지 못하는 시민들은 관능적 쾌락에 탐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워낙 건조하고 사실을 묘사하는 형식이어서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논조는 법률을 너무 가혹하게 적용한 결과가 빚어낸 현대의 모든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 면면히 이어진 스파르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 스파르타가 아니라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묘사한 스파르타와 플라톤이 '국가'에서 철학을 통해 이상화한 스파르타이다. (160)
스파르타가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우선 플라톤을 들 수 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를 통해 하나의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발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능력에 감탄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대 세계에 널리 퍼졌던 그리스도교가 플라톤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에 스파르타에 대한 인상도 꽤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중세 교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으므로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이 별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근대 국가가 발생했고 근대 국가는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여 국가의 권력을 강화해야 했으므로 스파르타를 하나의 정지적 이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스파르타에 관심이 높아졌다. 강력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플루타르코스가 서술한 스파르타가 매우 흥미로운 모델이 되었을 것 같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법을 만든 리쿠르고스는 공정하고 가혹한 법을 세우길 원했으며 군인들과 일반 백성을 구분하고자 했고 계급을 만들어 각각의 시민들이 자기 계급에 특화되어 국가에 봉사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서 탐욕과 빈부격차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금화나 은화를 못 쓰게 하고 철로 주화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출생률을 유지하기 위한 법과 관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소녀들이 젊은 남자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운동이나 춤을 추는 것이나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결혼했을 때 아내가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갖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장려했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도덕성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인간을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일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자유라고는 거의 누리지 못했다. 소년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생활의 규율과 질서가 그대로 유지된 까닭은, 누구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법률로 인정되지 않고,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마치 제각기 무엇을 고려해야 살 수 있는지, 점호가 있을 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는 전쟁터의 막사에 있는 것처럼 도시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리쿠르고스가 자신이 다스리던 도시에 일찍이 받아들인 다행스럽고 좋은 일 가운데 하나는, 다만 시민들이 더럽고 천한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금지함으로써 넘치는 휴식과 여유를 즐기게 했다는 점이다. (164)
스파르타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고립하면서 리쿠르고스가 세운 법에 따라서 이상적인 도시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개인의 자유는 철저하게 배제되었으며 오직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강제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여행도 할 수 없었고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스파르타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순수한 스파르타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를 좋게만 묘사했고 강력한 국가 건설을 원했던 정치인들은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스파르타를 자신들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 중 일부가 독일의 나치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으로 발전하게 된 까닭은 이런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학] 러셀서양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셀철학수업] 플라톤의 이상향_이상한 이상향 (1) | 2023.09.25 |
---|---|
[러셀철학수업] 플라톤 사상의 근원 (0) | 2023.09.18 |
[러셀철학수업] 소크라테스_얄밉기는 했을 듯 (0) | 2023.09.01 |
[러셀철학수업] 프로타고라스와 소피스트들 (0) | 2023.08.01 |
[러셀철학수업] 데모크리토스 (0) | 2023.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