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오는 개념이 최종 목적(telos)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피조물의 존재 목적을 종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진행형으로 보면서 마지막의 순간 혹은 마지막 때에 그 존재 목적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teleology 우리말로는 궁극적 목적론이라고 해야 할까요? 최종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펴는 것이 바로 teleology입니다. 종결되지 않은 목적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창조의 목적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면 창조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한 창조성이 지속되는 상황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바로 섭리(provid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섭리라는 말 자체가 미리 보다, 혹은 미리 결정되다라는 뜻이 있지만요. 섭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틸리히는 섭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미리 보는 것에 강조점을 두면 신은 관찰자에 불과하고 반면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강조하면 신은 모든 것의 계획자입니다. 틸리히는 두 가지 관점을 모두 거부합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섭리는 신의 영원한 활동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II, 183)
틸리히는 섭리와 숙명이 서로 대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요. 숙명이라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반하여 섭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성이 발휘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나 간섭이 아니라 지속적인 창조의 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창조의 순간들은 마지막 최종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 최종목적 혹은 궁극적인 목적을 telos라고 부르고 있고요.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신뢰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섭리에 대한 신뢰라고 해도 될 것 같고요. 그러나, 섭리는 미리 정해져 있고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성입니다. 이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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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하나 들어 보죠.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다가 이집트의 총리 대신에 오릅니다. 이러한 요셉의 성공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일이었을까요, 아닐까요? 섭리라는 말이 오해되기가 쉬운 말이라서 어쩌면 쓰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섭리가 숙명이나 운명과 대치되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섭리라는 말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요셉의 성공은 그의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패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하게도 그는 총리대신에 올랐지만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최종 목적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 최종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의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요셉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종적인 실패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 역사의 실패는 아니거든요. 개인이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은 그의 최종 목적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실패했더라도 그것이 최종 목적이 어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을 가질 때 신앙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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