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왕은 박사의 신학 수업
* 교재: 다니엘 밀리오리의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5. 선한 창조
5.6. 창조론과 현대 과학 (p. 208-212)
첫째,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언어다.
둘째, 과학과 신학의 언어는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셋째, 과학과 신학은 서로를 더 풍성하게 해야 한다.
기독교 창조론과 현대 과학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기독교 창조론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창세기에 나온 창조 기사는 2500년 정도 된 이야기다. 그리고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그 당시의 과학과 사람들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우주에 대해서 꽤 많은 정보를 밝혀 왔기 때문에 창세기에 나온 종교적 창조 이야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밀리오리가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 창조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형성된 매우 종교적인 확증이다.” (208) 따라서 현대 과학에서 설명하는 창조론은 과학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고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창조론은 종교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창조론에 대한 대결이 아니라 창조에 대한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이론 혹은 이야기로 접근해야 한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대표적인 학자는 이안 바버다. 그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그것은 바로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이다. 다른 학자들도 종교와 과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하기도 했지만 바버가 언급한 네 개의 분류 안에 대체로 끼어 넣을 수 있다. 따라서 바버의 분류는 자주 사용된다. 학자들은 대체로 종교와 과학이 대결하는 구도를 원하지 않는다. 대결해서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는 구조가 인류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은 대화나 통합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밀리오리는 창조론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원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은 사실을 나타내는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반면 종교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한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 사실을 나타내는 언어가 더 좋을까, 아니면 세상의 시작이 가지는 의미를 인상적으로 알려 주는 언어가 더 좋을까? 사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건조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우주 생성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 더 좋다고 여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나 신화와 같은 언어가 원리를 넘어서는 의미 파악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히려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밀리오리는 바르트의 표현을 빌려서 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과학과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진공청소기의 소리와 오르간의 소리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적절한 비유다.
둘째, 과학과 신학의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과학과 신학을 서로 배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보편적이지는 않다. 단지 그렇게 극단적인 사람들이 드러나기 쉽기 때문에 과학과 신학의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신학적인 극단주의자는 성경이 과학에도 충분히 사용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무오한 문서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과학에 대한 선전포고이지만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과학자들에게 조롱당하기 쉽다. 또한 반대로 진화론이 옳기 때문에 반드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밀리오리는 이와 같은 태도는 종교에 대해 총을 겨누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밀리오리는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둘 중의 한 쪽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이나 기독교 창조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환원주의나 신학에 도전하는 모든 이론을 박살내거나 지배하려는 신학적 제국주의 모두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자세다.
셋째, 과학과 신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더 풍성하게 해야 한다. 신학이 과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이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캐내고 있다. 정보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더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학은 과학으로부터 많이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신학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신학은 과학 앞에서 작아진다. 왜냐하면 신학이 과학에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밀리오리가 지적하는 것도 내가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하지만 신학은 과학에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그리고 연구 성과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핵폭탄 개발을 연구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신학이 제시해 줄 수 있다.
밀리오리는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신학 모두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밀리오리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과학 탐구에 내포된 신비의 차원에 열려 있어야 하며, 신앙과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협소한 관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목적 지향적 활동에 대한 비전에 열려 있어야 한다.” (212)
특별히 생태계 위기에 직면해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신학이 오랫동안 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지구와 동식물에게도 몹쓸 짓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다. 현재에는 과학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과학이 이룩한 신기한 업적 때문에 그런지 제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한 측면이 있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해서 과학과 신학은 각자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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