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신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유롭다.
저는 과정신학의 열렬한 신봉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과정신학이 자유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고 인간뿐만이 아닌 모든 것이 자유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헌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신학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은 모든 개체의 자유를 허용하되 단지 자유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하트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01) 과정신학은 완전한 자유나 완전한 통제 모두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과정신학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그들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한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만물은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단지 그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이 있다는 것이죠. 자유에 대한 이런 관점으로 과정신학은 진화를 설명합니다.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진화는 물질이 혹은 어떤 생명체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갑자기 코끼리를 낳을 수 없습니다. 진화는 어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생명체가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과정신학의 관점입니다. 물론 그 한계나 법칙을 만든 존재가 신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진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기로 한 것이지요.
진화와 창조를 화해시킬 수 있는 아주 논리 정연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진화의 방법은 방법 자체가 무시무시합니다. 진화는 수없는 생명의 죽음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방법입니다. 창조적 방법이 아닌 파괴적 방법이지요. 1%의 성공을 위해 99%의 실패가 필요한 방법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은 멸종했습니다. 진화는 최선의 방법일까요? 물질, 혹은 유기체에게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창조를 진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끔찍한 면이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서 그중에 날 수 있는 놈만 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혹은 사춘기 아이를 가출시키는 것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가출한 아이들 중 훌륭하게 클 아이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난관이 있을 것입니다.
진화도 방법은 방법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취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과정신학의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과정신학자는 신의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서 신의 전능을 포기하거든요. 신은 피조물을 사랑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화를 사랑의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입니다. 가출한 청소년을 볼 때 우리는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를 자유를 존중하는 신의 창조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화의 잔인성을 주목하는 학자는 진화를 신의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학자들은 신도 자연의 방법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이 완전하게 신의 통제를 받고 있다면 신은 수소 원자 세 개와 산소 원자 한 개를 가진 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H2O)은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연이 완전한 신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학자는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신이라도 수소 세 개와 산소 한 개로 물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자유와 진화를 연결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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