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신학 수업

[과정신학] 캐서린 켈러_제5장 "모험 무릅쓰기" in 길 위의 신학 On the Mystery

설왕은31 2021. 1. 1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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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켈러는 대표적인 과정신학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과정신학자로 부를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는데요. 요새 신학이 워낙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어서 어떤 한 분야에 많은 신학자가 포진되어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신학입니다. 화이트헤드가 영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에 영국 사람이면서 미국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주로 미국에 있는 신학자들이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당연히 과정신학에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가 꽤 활발하게 진행이 되다가 최근에는 좀 주춤하는 것 같습니다.

 

켈러 교수님은 지금 드류대학교에서 30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켈러 교수님의 제자의 제자가 교수가 될 정도로 제자들을 많이 키우셨고요. 그래서 영향력이 어마어마합니다. 저도 드류에서 켈러 교수님 수업도 듣고 모임도 참석하고 그랬는데요. 항상 똑똑한 학생들에 의해 둘러싸여 계셨죠. 2020년에 연세가 65세 정도 되신 것 같은데 워낙 건강하셔서 적어도 10년 이상은 더 가르치실 것 같습니다. 켈러 교수님은 제 박사학위 논문 심사 위원이기도 하셨고요. 세세하고 꼼꼼하게 제 논문을 읽어 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길 위의 신학이라는 책의 원서 제목은 "On the Mystery"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신비 위에서" 정도가 되겠네요.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여러 분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 나온 책이고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출간된 것은 2020년 초반입니다. 이 책은 켈러 교수님이 쓰신 책 중에는 아마도 가장 쉬운 책일 것 같습니다. 캐서린 켈러의 책은 어렵습니다. 항상 글을 시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쓰실 때가 많아서요.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글을 여러 번 읽을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잘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못했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워낙 어려운 철학도 많이 다루고 있고 또 글도 비유적으로 쓰시고 또 단어를 만들거나 희한하게 조합해서 쓰실 때가 많으셔서 켈러 교수님의 책은 번역하기 매우 곤란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On the Mystery"가 쉬워서 번역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 책의 5장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5장의 제목은 "Risk the adventure"이고요. 그대로 번역하면 "모험을 무릅쓰기" 정도가 될 것 같고요. 한국어 번역서에는 감시와 통제 시대의 열정으로서 사랑: 에로스와 아가페의 이분법을 넘어 모험을 감행하기라는 긴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5장에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부드러운 사랑입니다.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랑이 아닌 설득하는 사랑입니다. 설득이라는 단어는 플라톤이 신이 일하는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인데요. 과정철학자인 화이트헤드나 과정신학자의 대부 존 캅, 그리고 켈러 교수님까지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합니다. 과정신학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강압적이고 고압적이고 힘을 사용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하면 혼내는 사랑이 아닙니다. 과정신학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전통신학에서 이해하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전통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제 군주와 같은 분이죠. “나는 신이고 너는 피조물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 말에 복종해. 그러면 너의 삶이 편할 거야. 복도 많이 받을 거야.” 과정신학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신학에서는 하나님을 강압적인 전제 군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유혹, lur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유혹하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유혹이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서 매혹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는데요. 유혹이 주는 에로스적인 느낌 때문에 일부러 유혹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lure라는 단어는 목줄을 걸어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끼나 보답 같은 걸로 유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드럽고 친절한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캅은 하나님의 사랑을 창조적 사랑creative love이라고 부릅니다. 화이트헤드가 사용하는 유혹이라는 단어와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의미하는 바는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는 사랑도 강압적인 사랑이 아니고요. 설득하는 사랑입니다. 창조적 사랑이라고 부를 때 강조되는 측면은 새로움입니다. 창조라는 것은 언제나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캐서린 켈러가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열정입니다. passion이죠. 그런데 이 passion이라는 단어가 참 묘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볼 때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딱 고통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길게 설명을 하자면 passion고통을 느낄 정도의 강력한 감정적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은 좋은 감정입니다. 기분 좋은 감정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고통을 느끼게 되죠. Passion은 그런 열정적인 감정의 힘입니다. 제가 passion을 단지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감정은 자기 안에 갇혀 있을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passion은 하나님 안에 갇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게 힘을 전달합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감정적인 힘인데요. Passion은 강압적이지 않지만 분명히 힘이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켈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urge인데요. Urge는 단순은 설득이나 충고가 아닌 열심히 노오력하는 설득과 충고입니다.

 

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켈러가 사용하는 passion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은 544-45절입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44-45, 개정) 

 

237쪽에 나온 문장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무력함을 전하지 않으며, 정녕 통제력을 말하고 있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어떤 종류의 힘을 전달해 주고 있다.” (길 위의 신학, p.237)

 

하나님의 사랑은, 혹은 열정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사랑받는 대상을 통제하지 않고 그 대상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대상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해나 비의 비유가 적합합니다. 용기 있게 흘러 들어가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도 모험을 무릅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정만을 쏟는 분이 아닙니다. 열정을 쏟고 , 나는 할 일 다했다”고 말하면서 손을 떼는 분이 아닙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 결과적 본성을 말합니다. 원초적 본성은 신적인 유혹을 말하고 있고요. 결과적 본성은 존재들의 경험을 하나님이 다시 수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이 신을 창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신을 창조한다는 것은 신의 결과적 본성을 구성하는데 기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존 캅은 창조적 사랑과 더불어 응답적 사랑을 말합니다. 화이트헤드의 결과적 본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응에 응답하는 사랑, 또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시련에 함께 하는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결과적 본성, 그리고 존 캅의 응답적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 켈러의 com/passion입니다. 그러니까 켈러는 passioncom/passion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Com/passion이 번역하기 곤란한 말입니다. compassion이라고 하면 그냥 동정심인데요. Com/passion은 함께 하는 열정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한국어 번역서에서는 "함께-고난당하는-열정"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도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com/passion이라고 쓴 이유는 원래 compassion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동정심과 열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기 위한 신조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assion과 com/passion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일단 passion을 줍니다. 인간으로 한정해서 생각해보죠. 인간에게 열정을 줍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열정에 반응해서 자신도 사랑의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다면 고통을 느끼게 될 텐데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모른 척하지 않고 com/passion 합니다.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혹은 인간이 하나님의 열정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은 고통으로 com/passion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때는 com/passion에서 com의 의미는 약해지겠지만 말이죠. 고통을 느끼는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때도 com/passion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켈러의 관점에서 인간이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passion, 다른 하나는 com/passion입니다. 열정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고요. 우리가 그 열정을 받아들여서 모험을 무릅쓴 사랑을 시도하고 고통을 겪게 된다면 하나님이 다시금 우리와 함께 com/passion 하십니다.

 

꽤 좋은 구성입니다. Passioncom/passion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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