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러셀서양철학사

플라톤의 지식과 지각_러셀서양철학사18장

설왕은31 2024. 2. 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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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221-232

 

플라톤은 지식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이 확고했다. 그에게 지식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10년 후나 10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을 지식이라고 여겼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러셀은 이 장의 첫 문단에서 플라톤의 이론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근대인들은 대부분 경험적 지식이 지각에 의존하거나 지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플라톤이나 다른 특정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 사이에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지식은 감각에서 유래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진정한 지식은 개념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전혀 다른 학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2+2=4"는 진정한 지식이지만, "눈은 하얗다"는 진술은 너무 모호하고 불확실해서 철학자의 진리 체계 안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221)

 

 

 

현대인은 인간이 감각을 통한 경험으로 많은 양의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플라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한 경험은 늘 바뀌기 마련이고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지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와 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반대 주장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프로타고라스다. 그의 유명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인간이 세상의 기준으로 작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지개를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에게 무지개는 세 가지 색으로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곱 가지 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몇 가지가 아니라 빨간색에서 보라색까지 이르는 연속된 색깔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무지개의 색깔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지개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신만큼 지혜로울 수도 있지만 바보만큼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 각자의 기준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세상을 아는 것만큼이나 인간은 세상을 알 수 있다. 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인간도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바보가 세상을 아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도 그의 기준에서 세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를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우리를 그와 비교한다면 우리도 바보만큼 어리석게 세상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주장의 문제는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다는 데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보다 많이 안다거나 참된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대신해 아주 흥미로운 답변, 말하자면 어떤 판단이 다른 판단보다 더 참될 리는 없지만 더 나은 결과를 낸다는 의미에서 더 나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이 바로 실용주의를 암시한다. (223)

 

 

플라톤은 지각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무리해서 강조한다. 플라톤은 "존재와 비존재, 유사성과 비유사성, 동일성과 차이성, 단일성과 수 일반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25) 이에 대해서 러셀은 플라톤의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 플라톤은 감각만으로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은 가지 않지만 이런 예를 들어 보자.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내 앞을 지나간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검은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인식해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고 반성 작용을 거쳐야 한다. 검은 고양이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환영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존재와 관련해서 감각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러셀에 따르면 플라톤이 비판하는 세 가지 논제는 다음과 같다.

 

1. 지식은 지각이다.
2.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3. 만물은 흐름의 상태에 있다.  

 

 

결국 이 세 가지 논제를 다 부인하려면 지식에 속하는 것은 수학과 논리학 정도만 남는다. 수학은 인간의 감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항상 참으로 남을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수학 세계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될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수학적 지식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 

 

플라톤이 걱정했던 것은 상대주의적 경향이다. 올바름의 기준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다 각자가 선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성은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올바름의 기준은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도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만약 올바름의 기준이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이 무너질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무정부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지식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고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지식은 수학과 논리학이었다.

 

하지만 수학과 논리학이 세상에 진과 선과 미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장점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단점은 다양성이 사라지기 쉽고 수학과 논리학에는 정확한 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답에 도달하지 못하면 틀린 것으로 간주되고 틀린 것은 열등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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