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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조직신학3_195-198] 52. 소외를 극복한 예수

틸리히는 인간에게 소외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불신앙, 자기 높임, 욕망이죠. 불신앙은 존재의 근거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고요. 자기 높임 hubris은 불신앙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의 근거로부터 소외된 상태로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망은 자기 주위의 모든 존재를 자기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예수에게는 인간이 소외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틸리히의 설명이 좀 부실하기는 합니다. 대충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결정적인 한방이 없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서 자기 높임에 대하여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적 모습은 그의 메시야적 소명에 대한 그..

[틸리히조직신학3_189-195] 51. 예수의 말, 행동, 그리고 고난

이 부분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존재가 표현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예수의 말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예수가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독특했느냐 둘 중에 후자가 맞다는 주장입니다. 예수가 좋은 말씀을 전해서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좋은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죠. 그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그의 존재이다.... 이로부터 뒤따르는 결론은 그의 말도, 그의 행위도, 그의 고난도, 그의 내적인 삶도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189) 틸리히는 예수의 말과 행동과 고난이 그가 새로운 존재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 표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좋은 도덕 선생님으로 여겨야 한다는..

[틸리히조직신학3_187-188] 50. 예수가 새로운 존재이다

틸리히는 이 부분의 제목을 "한 인격적 삶 속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라고 했지만 좀 어려워서 제목을 새로 달았습니다. "예수가 새로운 존재이다"라는 제목이 틸리히가 이 부분에서 말하려는 내용은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아니 우주의 역사에서 소외라는 실존의 상태를 완전하게 극복한 한 존재가 나타났는데 그 존재가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존재는 한 인격적 삶 a personal life 속에 나타났다. (187) 한 인격적 삶이라는 말도 좀 어렵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삶'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해하기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존재는 한 인간의 삶에서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성탄절설교] 요한복음 1:1-14_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본문: 요한복음 1:1-14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일시: 2021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예배 (요 1:1-14, 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설교 2021.12.25

[틸리히조직신학3_184-187] 49.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시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 대한 기대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가지고 올 새로운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이며 지도자이고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믿었던 예수가 옛 시대의 세력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틸리히는 제자들이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희망의 파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죠. 제자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합니다. 희망을 내용을 바꿉니다. 이렇게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의 성령 체험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신학적 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

[틸리히조직신학3_183-184] 48.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역사 비평과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다 보면 성서의 네 가지 복음서 중에 가장 정확한 역사 기록은 무엇인지 찾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 우선설이니 마태 우선설이니 하는 말이 나오죠. 역사 비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장 오래된 복음서를 찾아서 그것을 가장 기본 자료로 삼고 나머지는 그 복음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무엇이 가장 먼저 쓰인 자료인지 연구하고 그에 대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마가 우선설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천 년 된 역사 자료들의 선후 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에서는 일치한다. (p.183) 역사적 선후 관계를 ..

[1분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3_귀하게 소중하게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3, 개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괴롭기도 합니다. 더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와 같은 사랑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미워하기도 하겠죠. 때로는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대해 주세요. ^^ 사랑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괴로울 때 특히 더 그래야 합니다.

1분말씀 2021.12.18

[신학노트] 로고스란 무엇인가?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로고스는 열 개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ground", "plea", "opinion", "expectation", "word", "speech", "account", "reason", "proportion", and "discourse") 각각의 철학 학파에서 로고스를 자신만의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로고스를 정교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곳에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로고스라는 말이 사용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는 '말'과 '이성', 그리고 저는 한 가지 더해서 '대화'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노트 2021.12.16

[틸리히조직신학3_176-183] 47.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원래 이 부분의 제목은 "신앙과 역사적 회의주의"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틸리히가 붙여 놓은 제목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을 공부하면서 제가 궁금했던 질문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예수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인정하고,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도 저는 믿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나도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좀 답답했습니..

[틸리히조직신학3_168-176] 46. 역사적 연구와 신학

역사비평은 그리스도교에 위험 요소이기도 했지만 신학에 기여한 바도 많이 있습니다. 틸리히도 비슷하게 지적을 했지만, 제가 볼 때 역사비평의 큰 공헌 중 하나는 현대신학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는 슐라이어마허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상징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구분의 토대 위에서 현대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비평이 없었다면 이러한 구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 성서 이야기 속에서 경험적인 요소와 전설적인 요소와 신화적인 요소 사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169) 이 말은 전에는 성서에 나온 모든..

[1분말씀] 요한일서 4:8_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요일 4:8, 개정)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스스로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 중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그렇다면 그 지식은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릿속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1분말씀 2021.12.11

[틸리히조직신학3_159-168] 45. 역사적 예수 연구와 그 실패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말 자체가 하나의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굉장히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예수면 예수이지 왜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는 예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보거나, 듣거나 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경험한 예수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인 예수라는 말입니다. 틸리히가 이 앞부분에 계속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사실과 신앙이 서로 상호 의존하는 방식으로 단단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실과 신앙은 50대 50이 아니라 신앙 쪽이 훨씬 더 비중이 높습니다. 누군가는 신앙의 비중..

[틸리히조직신학3_157-159] 44. 역사와 그리스도

틸리히는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가?"입니다. 또는 역사가 완전히 끝이 나서, 달리 말하면 역사를 논할 수 있는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리스도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틸리히는 자신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인류는 당장 오늘이라도 자신을 모조리 멸망시킬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소외라는 인간 실존을 완전히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나라를 시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를 위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조건에 대..

[대림절설교] 기다림의 기술_누가복음 1:68-79

날짜: 2021년 12월 5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기다림의 기술 (눅 1:68-79, 개정)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설교 2021.12.05

[1분말씀] 시편 46:10_가만히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현대인의 문제점 중 하나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화면을 많이 봅니다. 예전에는 TV 화면을 많이 봤지만 요새는 휴대폰 화면을 많이 봅니다.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계속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글자도 나오고 그림도 나오고 동영상도 나옵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풍조에 휩쓸려 다니기 쉽습니다. 요새 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더 필요한 것이 바로 '가만히 있는 시간'입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야 하나님의 활동이 감지되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5분만이라도 '가만히' 있어 봅시다.

1분말씀 2021.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