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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조직신학3_130-131] 35. 금욕에 대하여

틸리히는 구원을 위해 실천하는 금욕주의의 방법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죠. 틸리히는 금욕에 대해서는 긍정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나친 금욕, 달리 말하면 금욕주의가 문제인 것이죠. 틸리히가 말하는 소외의 세 가지 표지는 불신앙, 자기 높임, 그리고 지나친 욕구입니다. 금욕은 욕구를 억제하는 것인데요. 인간이 가지는 무한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적절한 금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의 생각은 다음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과정들의 한 요소로서의 금욕주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구원의 시도로서의 금욕주의는 위험한 왜곡이며 실패이다. (131) 인간의 실존 상..

[틸리히조직신학3_130-131] 34. 자기 구원의 율법주의적인 방법들

율법은 인간에게 그의 본질적인 본성, 즉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 자신에 대한 그의 참된 관계를 보여준다. (128) 그가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상태를 봄으로써 자신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의해서 이끌리는 인간은 의지의 노예성을 무시한 채 그의 힘으로 그의 본질적인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서 그가 상실한 것을 다시 얻으려고 시도한다. (128-129) 사랑은 소외의 상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명령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랑이 명령될 수 없는 것은 사랑이란 명령이 주어지기 이전에 명령된 것을 선행하고 있고 성취하고 있는 재결합의 힘이기 때문이다. (129) 율법주의가 자기 구원의 한 방법으로 시도될 때마다 이 시도는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129) 율법주의의 왜곡성은 율법주의가 ..

카테고리 없음 2021.10.27

[틸리히조직신학3_127-128] 33. 자기 구원과 종교

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과 그 실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서론이 엄청 길었는데 드디어 이제 본론이 나오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조직신학 세 번째 책이 그리스도론인데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을 소개하고 그 방법들이 모조리 실패했다고 서술합니다. 첫 번째가 종교입니다. 종교가 자기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죠.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는 종교사가 인간의 자기 구원의 시도와 실패의 역사인 한에서 종교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 (127)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1분말씀] 시편 138:3

(시 138:3, 개정)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부른 날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힘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의 시제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죠. 살다 보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극도로 절망적이지 않더라도 어려운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 맥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불러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억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힘을 주셨던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시인이 다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도..

1분말씀 2021.10.23

[틸리히조직신학3_125-127] 32. 의지의 노예

그리스도교 신학자 사이에 계속 논쟁을 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자유와 운명이라는 주제입니다. 틸리히도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먼저는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도 이것 때문에 한참을 싸웠고요. 펠라기우스 논쟁이라고 하고요. 마틴 루터와 에라스무스도 이 주제로 토론을 했죠. 여기서 나온 논문이 루터가 쓴 의지의 노예라는 논문입니다. 운명 속에 살고 있는 실존 또는 의지의 노예로서 살고 있는 실존을 말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이고요. 반대라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이겠죠. 토론의 주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분법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토론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이 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인..

[신학노트]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_레오나르도 보프의 관점으로

예수가 그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외쳤던 말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고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지금까지 잘 살고 있었다면 회개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회개, 즉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을 바꾸고자 마음을 먹고 실제로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가 회개를 하라고 했는데요. 왜요? 왜 회개를 해야 합니까?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취했던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

신학노트 2021.10.21

[틸리히조직신학3_123-124] 31. '저주'라는 상징

절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주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주는 사람한테 받을 수도 있지만 절망에 상태에 빠져서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의 저주'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영원한 저주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저주이겠지요. 하지만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원과 저주는 서로 반대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시간은 그 자신과 함께 끝난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저주'라는 용어를 신학적인 어휘에서 삭제해야만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저주를 영원으로부터의 배제의 의미로 말해야 한다. (124) 영원..

[틸리히 조직신학III_122-123] 30.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롬 1:18, 개정)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대표 구절입니다. 진노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 보면 신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은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진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하나님의 진노는 '상징'이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외 상태에 있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신들의 분노'라는 개념은 그의 감정이 다른 유한한..

[1분말씀] 빌립보서 1:11 의의 열매

(빌립보서 1장 / 개역개정)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의로움은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좋은 관계 모두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많은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의의 열매가 가득한 귀한 하나님의 자녀 되시길 기원합니다.

1분말씀 2021.10.16

십자가에서 죽은 이는 누구인가?_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p.278-291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요? 쉽게 대답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다면 예수의 죽음은 예수만의 죽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고려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또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도 죽고 하나님도 같이 죽은 것일까요? 나중에 예수는 부활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예수와 함께 부활하셨을까요?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제목은 이렇게 정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고 주장..

신학노트 2021.10.14

[틸리히조직신학3_115-119] 28. 소외, 의심과 무의미

유한성은 의심을 포함한다.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전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115) 그러나 유한성은 또한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포함한다. 불확실성은 유한한 존재의 일반적인 불안정성, 그의 존재의 우연성, 그는 스스로 있지 않고 "존재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라는 사실, 필연적인 장소와 필연적인 현재의 결여의 표현이다. (116) 이 모든 형태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유한성에, 그것이 창조된 것인 한 피조물의 선함에 속한다. (116) 만일 소외의 상태에서 궁극적인 것의 차원이 차단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117) 소외는 실존 구조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 소외가 어떻게 해서 압도적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역사의 문제이다. 역사에..

[틸리히조직신학3_112-115] 27. 소외, 고난과 고독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결과인 고난과 고독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난과 고독은 문제죠. 영어로는 suffering과 aloneness인데 우리말로 고난과 고독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둘 다 나쁜 것 같은데 틸리히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요악이라고 하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인데요. 틸리히에 따르면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죽음처럼 유한성의 한 요소이다. 고난은 몽상적인 순진무구의 상태 속에서는 제거되지 않고 축복으로 바뀐다. (112) 틸리히는 고난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

[1분말씀] 시편 145:3_크게 크게 찬양하라

(시 145:3, 개정)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찬양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시인은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찬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크게 찬양해도 하나님의 크심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얼핏 봐도 세상은 참 크고 아름다우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오늘은 마음으로만 감탄하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크게 찬양합시다.

1분말씀 2021.10.09

[틸리히조직신학3_109-112] 26. 소외, 시간과 공간

시간, 공간, 인과성, 실체를 포함하는 유한성의 범주적인 본성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로서 타당한 것이다. (110) 범주들은 불안을 낳지만 이 범주들은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우위가 경험된다면 용기에 의해서 긍정될 수 있다. (110) 시간이 존재 자체의 힘의 현존을 통한 "영원한 지금" 없이 경험될 때, 시간은 현실적인 현재가 없는 단순한 무상함으로 알려진다. (110) 그는 자신을 위해서 기념물을 만들어서 그의 시간이 아닌 미래 속에 존재하려고 시도한다. (110) 공간이 존재 자체의 힘의 현존으로서의 "영원한 여기" 없이 경험될 때, 공간은 공간적인 우연성으로서, 즉 인간이 속해야 할 필연적인 공간이 없는 것으로 경험된다. (111) 최후의 집에 대한 모든 동경 속에는 이런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틸리히조직신학3_107-109] 25.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을까?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일부분 맞고 일부분 틀린 말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대체로 맞냐, 틀리냐로 물어보면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흑백논리로 물어보면 틀리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으로서의 불멸성은 플라톤의 교리로서는 가능할지라도 기독교의 교리는 아니다." (107)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이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나의 영혼'은 '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기 동일..